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 타카모토 (문단 편집) == 개요 ==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모리가 제53대 당주. [[모리 모토나리]]의 장남이자 [[모리 테루모토]]의 아버지. [[모리 가 3형제]]의 장남. 아버지인 모토나리나 동생들인 [[킷카와 모토하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동생들이 성씨가 다른 건 두 가문의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각자 [[양자]]로 집어넣고 나중에 계략을 써서 가문을 빼앗았기 때문.] 당시 기준으로 꽤 오래 살았던 것과 달리, 타카모토는 아버지인 모토나리보다도 먼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물론 모토나리가 도중에 은거해서 타카모토가 당주가 되긴 했지만, 당시 다들 그랬듯 은거는 실제 은퇴가 아니고 실권은 모토나리가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모리 가의 실질적 권력은 바로 손자 모리 테루모토에게 넘어갔다. 부드러운 성품의 인물로, 개성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판도가 넓어진 모리 가문을 다스리기에는 적합한 인물이었다는 평이다. 15세 때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인질]]로 보내어져서 야마구치(山口)에서 3년 여의 인질 생활을 보냈는데, 인질이라기보다는 '''손님으로서 대접을 받으면서 우아한 생활을 즐겼다'''.[* 오우치의 본거인 야마구치는 당시 서쪽의 교토라 불리울 정도였고, 요시타카 역시 문화인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애당초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서양이든 일본이든 말이 인질이지 복속한 가신 가문들의 자식들을 주가에서 정중히 잘 대우하고 좋은 교육을 시켜주는 것이 훨씬 더 일반적이었다. 서양에서도 가신 가문들의 아들들이 주가에 어릴 때부터 살면서 시종 노릇을 하는 일이 흔했으며(하인이 아니다) 일본에서 또한 그런 사례가 흔했는데 어지간 해서는 좋은 대우를 받았다. 주가 입장에서도 가신의 아들들은 장차 본가를 보필해야할 미래의 가신들이니 당연히 좋은 교육을 제공하고 좋은 대우를 해서 포섭해 놓는 것이 가문의 장래에 이득인 일이었다.] 요시타카 자체가 온화한 성격이기도 했으려니와 거기에 용모가 단정했던 타카모토를 마음에 들어하여 제대로 대우해주었다고 한다. 원복(元服, 성인식) 때에는 요시타카가 자신의 이름 중 한 자(隆)를 주었고, 나중에는 자신의 양녀를 타카모토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부인과는 금슬이 아주 좋아서, 타카모토는 평생 측실을 두지 않았다.] 타카모토의 인질 시절은 실보다 오히려 득이 많은 성공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데, 우선 모리 가문은 당시의 강대 세력이었던 오우치 가의 신뢰를 얻으면서 세력을 키워나가게 되고 인질 시절에 오우치 가문의 여러 가신들[* 그 중에는 훗날 오우치 부흥이자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한 스에 하루카타도 있다.]과도 친교를 쌓아 훗날 외교 관계에도 플러스 요인이 되었으며, 타카모토 자신도 요시타카의 영향을 받아 지식과 교양을 몸에 익혔다. 단 이 부분은 타카모토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쳐, 지나치게 온화한 성격이 되었다고.[*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전국 시대에 있어서는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 모토나리가 보낸 서장에 “노라던가 예능 같은 거 다 쓸모없어. 무략과 지략이 있어야지.”라는 내용이 있기도.] 1540년에 가문으로 복귀, 1546년에 아버지 모토나리의 급작스러운 은거로 당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실제로는 1557년이라는 설도 있음.] 하지만 이는 좀 더 자유로이 모략 활동을 하기 위한 모토나리의 책략이어서, 당주이기는 해도 실권은 모토나리가 그대로 쥐고 있었다. 당장 후술할 [[이츠쿠시마 전투]]도 은거했다는 모토나리가 [[친정]]했다. 그 뒤로 모토나리가 진짜 은퇴를 하려고 한 적도 있는데 그럼 자기도 아버지를 따라서 아들에게 다 물려주고 은거하겠다고 억지를 부려서(...) 계속 모토나리가 뒤를 봐줬다고. 1551년에 [[스에 하루카타]]에게 [[오우치 요시타카]]가 죽음을 당하게 되자(다이네이지의 변), 타카모토는 분노하여 스에 하루카타 타도를 주장하게 된다. 배신자에게 복수하겠다는 명분 챙기기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요시타카에 대한 보은의 의미도 담겨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모토나리는 신중하고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 것 자체도 하루카타를 방심케하기 위한 모토나리의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다.] 타카모토의 주장이 가신들에게 설득력을 얻게 되자 모토나리도 움직이게 되고 결국 1555년 [[이츠쿠시마 전투]]에서 스에 하루카타를 멸망시키고, 실제로 권력을 가진 하루카타가 허망하게 죽자 [[오우치]] 가문은 허울만 남았다. 이어서 1557년에는 남은 오우치 가문을 멸망시킨다. 구 오우치 가문의 영토를 둘러싸고 [[오토모 소린]] 및 [[아마고 하루히사]] 등과 싸움을 벌이던 중이던 에이로쿠 6년 9월 1일(서기로 치면 1563년 9월 18일) 아마고 씨 공격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산하에 있던 고쿠진 와치 마사하루(和智 誠春)의 접대를 받은 후 원인불명으로 급사했다. 그의 급사의 원인은 식중독 또는 독설설이 제기된 바 있다. 아버지 모토나리는 장남의 갑작스런 죽음에 비탄에 빠졌고, 독살의 혐의를 씌워서 여러 명의 가신들을 주살하기도 하였다. 타카모토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타카모토의 어린 아들인 테루모토가 가문을 잇게 되었는데, 너무도 어렸기 때문에 모토나리가 계속해서 모리 가의 실권을 쥐었다. 일설에는 테루모토가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가독을 넘겨주고 모토나리는 정말 은퇴하려고 했는데 테루모토曰 "아버지는 마흔이 다 될 때까지 후견을 봐주셨으면서 저한테는 왜 벌써 다 넘기려 하십니까?"라고 딴지를 걸었다고도 한다(...) ~~아버지가 겹쳐보인다면 기분 탓이다.~~ 테루모토는 천성적으로 유약하고 우유부단했기 때문에 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판단을 잘못하고 집안을 말아먹는 계기를 제공했다. 모리 타카모토는 군사 및 정치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온화하고 효심 지극한 성격으로 인해 한 가문의 당주임에도 적극적인 주도를 하기보다는 아버지의 밑에서 지시를 따르는 쪽을 따랐던, 전국 시대를 살아가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비운의 인물이었다. 잘난 동생과 전설적인 업적을 세운 아버지 사이에 끼어서 늘 자기 자신을 '쓸모없다', '능력이 없다'며 비하하는 등, 자존감이 크게 결핍된 인물이었음을 알려주는 서찰과 자료가 많이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